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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5-23 12:23
아버지 다산정약용의 자녀사랑의 예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409  
오늘날 더 절실한 다산아버지의 ‘위기관리’ 가르침
#오늘날 더 절실한 다산의 ‘위기관리’ 가르침


위기는 인간 개인의 육체적·정신적인 면에서부터 기업체나 사회, 국가에서도 발생한다. 특히 현대 사회는 급격한 변화가 상시적으로 일어나고 있어 어느 시대보다 ‘위기관리’(crisis management)가 중요하지고 있다.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상이고 뜻밖에 위기에 봉착하더라도 위기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미국 금융위기에서 시작돼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세계경제위기에서 드러나듯이 기업경영에서는 ‘위기관리’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때 세계적인 기업으로 위세를 떨친 기업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기도 하는데, 위기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위기관리최고책임자인 CRO(Chief Risk Officer)를 두고 있는 대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위기관리는 회사나 국가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가정들도 위기를 맞았을 때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가정과 그 가정의 구성원들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지금과 같은 국난의 시대를 살며 그 자신의 삶조차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가문의 CEO로서 위기관리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대역 죄인으로 몰린 다산은 40세 때에 유배 길에 올랐고 가문은 풍비박산당하는 위기상황에 처했다. 자녀교육에 가장 힘써야 할 시기에 18년을 넘게 고스란히 유배지에서 보낸 다산이었기에 아버지로서 자녀교육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다산은 유배지에 있으면서도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공부에 힘쓸 것을 독려하면서 가정의 위기관리에 나섰다.


# 편지 통해 자녀교육 나서다


다산은 먼저 자신의 귀양으로 위기에 처한 자녀들에게 ‘문명세계를 떠나지 말아라’라는 편지로 ‘한양 입성’이라는 특명을 내린다. “만약 벼슬길이 끊어져 버리면 빨리 서울에 붙어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산은 자신의 유배와 형들의 불행한 일로 인해 집안이 위기에 처하자 자녀들에게 ‘서울사수’라는 응급처방을 내렸던 것이다. 나아가 다산은 두 아들에게 서울 주변(수도권)을 떠나서는 안 되며, 가능하면 서울 한복판으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서 살게 하였다만, 앞으로는 오직 서울의 십리 안에만 가히 살아야 한다. 또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다.”

당시 한양은 외국문물과 정보접근 등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시대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서울에 살 필요가 있었다. 자칫 시골에 은둔해 산다면 재기의 기회조차 잃을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앞으로 어떻게든 서울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는 ‘서울입성’을 주문한 것이다. 다산은 교육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자녀교육에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유배당한 처지에 있던 다산으로서는 ‘서울사수’라는 지침은 공격적인 가문 경영에 해당할 것이다. 자신의 유배를 비관하거나 혹은 ‘자손보호’를 명목으로 정치적으로 화를 당하지 않게 고향에서 안분자족하며 살 것을 권고했을 수도 있었지만 다산은 그렇지 않았다. 두 아들에게 과거시험을 볼 수 없더라도 학문을 통해 성인이나 문장가는 될 수 있다고 독려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혼인길이 막혀 비천한 집안과 결혼해 물고기의 입술이나 강아지의 이마 몰골을 한 자식이 태어나면 그 집안은 영영 끝장이 난다. 이래도 학문을 게을리 할 작정이냐.” 다산은 두 아들에게 다소 ‘세속적’인 비유를 동원하면서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했는데, 다소 세속적인 비유지만 오히려 더 아버지로서의 정을 느낄 수 있다.

다산은 불우한 환경과 악조건에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자신을 일으켜 세운 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두 아들에게 들려주었다. 이 중에서 다산 자신을 학문의 세계로 이끈 등대 역할을 한 성호 이익을 역경을 극복하고 학자로 성공한 모델로 꼽았다. 다산은 성호 이익을 자신이 본받아야 할 ‘역할모델’로 삼은 것이다.


# 자녀의 방을 ‘서향묵미각’으로 꾸며주다


다산의 자녀교육 열정은 요즘 부모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철저했다. 다산의 경우 한양을 떠나 지방으로 공무원 생활을 한 적이 있다. 다산이 36세 때에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로 부임했을 때에는 두 아들을 위해 두 수레나 가득히 책을 싣고 와 직접 ‘서향묵미각(書香墨味閣)’이라고 이름붙인 공부방을 직접 꾸며주면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서향묵미각이란 ‘책의 향기와 먹의 맛이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그럼, 다산의 가르침을 받은 그 후손들은 어떻게 됐을까. 다산의 가르침대로 두 아들은 독서를 통해 세상을 읽는 눈을 기르면서 당대의 문장가로 우뚝 서게 된다. 과거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자포자기 하지 않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대역죄인의 아들이어서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해도 성인이나 문장가가 될 수 있다”는 다산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학문을 닦았던 것이다. 장남인 정학연은 추사 김정희와 친구로 지내면서 당대에 이름을 떨친 시인이 되었다. 동생 학유도 당대의 시인으로 ‘농가월령가’를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산은 18년 동안 긴 유배생활을 했지만 후학들을 가르치며 단 한 번도 좌절하지 않고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 활동을 펼쳐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다산은 억울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실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단한 귀양살이에도 늘 자신을 채찍질하며 열성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또 가문의 CEO로서 유배지에서도 위기관리에 직접 나서 두 아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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